2012년 8,784시간

연말과 새해 첫날을 꼬박 일해서 오늘 사이트 하나를 오픈했다.

작은 규모의 심플한 사이트지만, 몇 달을 계속 미뤄지면서 숙제처럼 남아 있던 거라 기분이 후련하다.
데이타를 늦게 늦게 주고 ‘작업이 내일까지 되나요? ‘라는 요청은 여전히 당황스러운 거였지만, 대체로 원활한 소통하에 단기간에 목적했던 데드라인을 맞추었다.
결과도 나쁘지 않은 듯.
예전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빼곡하게 이거저거 넣다보면 애초에 공들였던 디자인은 다 흐트러지고 망가져서 속 상한 적이 꽤 있었는데, 요즘엔 그런 일이 많지 않다. 내가 일에 적응한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트랜드의 영향이 크다. “심플하고 모던하고 미니멀”하기도 한” 것들이 어느 정도 통하는 트랜드이니, 잡스형에게 고마움을 표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사람들의 디자인 감각이 월등히 나아졌다는 것도 일리가 있다.  
 
예전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여백을 못견뎌 하는 지가 늘 의아했다.
특히나 대문에다 줄줄이 있는 걸 다 끄집어내려는 거, 거의 모든 메뉴의 바로가기버튼을 대문에 늘어 놓아 달라할 땐 참 난감했다. 그런 디자인은 ‘나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큰 소리로 길게 주장하는 사람의 조급함과 촌스러움을 닮아 있다.
뭐 그게 컨셉이라 할 경우엔 어쩔 수 없지만.
어쨌거나 멋모르고 시작한 초창기부터 ‘여백’이 많다는 말을 들어온 내게는 나쁘지 않은 변화이긴 하나,  
그런 것들이 노멀해져 그 가운데서 또 차별화되는 디자인을 해야하는 과제가 생긴 것이니 뭐 쌤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조용히 일을 하고 세 끼 맞추어 밥을 먹고 감기약을 털어넣으며 한 해를 건너 새해를 맞았다. 그렇게 꽤나 미니멀한 포즈로, 감기와 헐렁하게 싸우며 2012년의 8,784시간을 맞았다.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이가 맞이하지 못한 2012년이라는 생각이, 문득 ‘목숨’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새해를 맞이하면서 보기에 더없이 좋은 영화,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기적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가슴팍에 깃발처럼 품고사는 일, 그 자체가 삶의 기적이라는 거지.
기적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에게 포착된 모든 찰나의 순간들이 그렇듯이.
정말 기분좋은 영화야. 아이들이 숨막히게 예뻐.
그래서 눈물이 났어.
2012년. 지구가 멸망한다는 그 해를 맞이하면서도 이리 시큰둥하지만,
그래도 너절해진 소망 같은 게 남아 있을 지도 몰라.
잘 찾아서 펄펄 휘날리게 해볼까봐.
진짜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기적.

이 영화를 추천해. 새해선물로.

….

카메라 바디의 포커스 미세조정 기능이 기특하다.

렌즈가 심하게 전핀(포커스가 앞에서 맞는 것)이라는 진단을 받고 잠깐 긴장했더랬다. 정품(정식으로 관세를 내고 수입된 제품)이 아닌 지라 국내에선 아예 AS가 안되기 때문이다. 이걸 핑계로 한번도 안가본 일본엘 놀러 가야겠군, 이라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팔자면 좋겠지만 뭐 그럴 처지도 아니므로.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스마트한 바디에서 그만큼 포커스를 뒤로 설정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렌즈에서 +5가 나와서 바디에서 -5를 해주면 둘이 만나 0이 되어 포커스가 제대로 맞게 되는 것이다.
“이런 스마트한 길이!”
궁합이 좋은 관계란 것도 그와 같을 것이다. 내가 못 미치거나 오바가 되는 지점을 상대방이 거꾸로 맞춰줄 수 있다면  삶을 살아내는데 있어 함께 멀쩡해지고두 개체가 조화롭게 기능할 수 있는.
참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그토록 관계에 집착하게 된 것에는 이러한 관계에 대한 기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일에서도, 어쩔 수 없이 부대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실수가 잦아졌다. 소홀하거나 엉뚱하게 과민해서 생기는 실수들이다.(물론 전자가 월등히 많다. 나는 디테일이 너무 부족한 사람!)
일을 맡긴 단체가 정산을 위해 요청한 전자세금계산서발행에 한나절을 소비하면서, 새로 장만한 무한잉크 장착 프린터기와 반나절을 씨름하면서 드는 생각은, 빠릿빠릿 일 잘하고 똑똑한 젊은 친구와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나 라는 것. 자잘한 말과 행동들의 실수를 곱씹으면서 휘릭 지나가는 생각은, 이런 것들을 일상적으로 함께 이야기하고 풀고 나아갈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게 참 좋긴 하겠구나 라는 것.
뭐 하나 어쩌랴, (길은 가야하고!) 진작에 그러한 시스템을 장만해놓지 못했다 하여, 또 포커스가 좀 안맞고 잦은 실수로 일상이 숭숭 구멍이 난다 하여 일이나 삶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니, 시간이 좀 걸리고 몸이 피곤하고 보기에 썩 좋지 않더라도 꿋꿋하게 일을 하고 삶을 살아내고 해야할 것이다. “달려라 하니”처럼.(촬영 다니면서 만났던 공연팀 사람들이 뒷풀이 자리에서 나를 이렇게 불러주어 기분이 좋았다. 작은 몸집에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들고 혼자 먼 ‘소외지역’까지 촬영을 다니는 내가 그런 이미지로 보였나보다. 이전에도 들었던 적이 있는데,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프린터는 이틀만에 안정화되었다. 무선 기능도 되니 노트북으로 작업을 할 때에도 매우 편리하겠다. 보통명사로 불리는 “무한잉크”라는 말이 재밌다. ‘무한잉크’라는 건 사실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고 아라비안 나이트나 동화에나 나올 법한 것인데 이것이 무한잉크로 불리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 비싸고 용량 인색한 정품 잉크를 쓰던 이들이 이걸 쓰면서 갖는 느낌이 “무한”과 같았으리라. 신체적인 걸 비롯해 여러 가지로 내가 가진 한계가 적나라해지는 시기라 무한이라는 단어가 그리 주목을 끄는 건 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할 일이 딴 생각없이 일할 수 있기에 충분할 만큼 모였다. 조금 바쁘게, 바깥 세상과의 접점은 조금 줄이면서, 조용히 한 해를 넘을 생각이다.
내 안에 발생된 장애를 복구해주거나 보완해줄 장치가 없더라도, 무한잉크는 장만하지 못했더라도,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음을 잊지 말고!
정신 차리자.

아무 생각없이

아무 생각없이도, 시간이 참 잘도 간다.

그러니 생각이란 건 참 쓰잘 데가 없어,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Merry Christmas!

작년에 올렸던 크리스마스 캐롤을 찾아 듣는다.  
새벽송을 돌고 노래나 연극 공연도 떠들썩하게 했던 어린 시절과, 나름 청춘의 달콤함이 있던 시절을 거쳐, 근래엔 아무 상관없이 시큰둥하게 보내던-사실 아무 상관없는 게 맞지만- 크리스마스가 이번엔 좀 훈훈한 느낌으로 남는 것은, 하얀 눈 폴폴 내리던 그 밤거리 풍경과, 거기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맞았던, 기꺼이 내게 삶의 에너지를 나누어주는 그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날 그 거리에서 내 품에 안기게 된 이 곰인형.
내내 혼자였던 푸우인형와 나란히 놓고 보니, 이 녀석의 표정도 달라보인다.
분홍색 땡땡이 리본을 떼어내고 예쁜 체크 넥타이를 만들어 매어주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푸석푸석 바스라져버릴 듯한 극건성의 감성으로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아직 동심 같은 것이 남아있단 거니,
당신, 나이값 못한다고 흉보지는 마시길.    
어쨌든 오늘 하루, 시큰둥하거나 간절하거나, 조용하거나 떠들썩하거나 상관없이,  
모두들 춥지 않은, 훈훈한 시간들을 보내시길.
Merry Christma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음악 선물 하나.

       

오랫만에 웹표준.

진보넷의 메타 블로그인 진보블로그에 종종 들르는데 오늘은 이런 게 올라왔다.
웹표준과 관련한 문제의식들을 보니 반가움이 들었다. 내가 직장에서 웹기획일을 하던 즈음에 가장 많이 발설했던 단어도 웹표준이었으므로.
아주 오래 전 어떤 운동 단체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컴맹에 가까운 실무자에게 내가 했던 말도 생각났다.
지금 시대 컴퓨터는 책상, 종이와 연필 같은 필수품이라고(뭐 지금 생각하면 적당한 비유는 아니다만), 기계(기술도 아닌)에 대한 혐오를 표방하며 제껴둘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데이타를 넘겨받고 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 상태에서 보상은 극히 미미한 데다 요구받는 일은 많다보니 그러한 기술과 엔지니어에 대한 경시가 약간의 짜증이 났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큰 안타까움이 있었다. 문화라는 것을 매개로 대중사업을 펼쳐야하는 이들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물론 그 실무자가 아는 후배였기에 조심스레 건넸던 조언이긴 했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고, 컴퓨터가 단지 비인간적인 하드웨어-기계에 불과한 것은 아니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 되었으며, 그에 기반한 각종 기기들, 소프트웨어와 결합한 웹은 최근에 이슈가 된 여러 사건들에서 명확히 드러났듯이 진보진영의 가장 강력한 매체가 되었다.
이번 서울시장선거에서 있었던 디도스 공격과 이를 간파해내고 이슈화한 과정을 보면, 기술문명에 대한 태도의 차이와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뭐 초기웹이 지녔던 진보적인 기본정신을 생각해본다면 그 연관성을 순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 기술의 시작을, 여전한 기반을, 그 무시무시한 동력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진보 블로그를 기웃리다보면 올라오는 콘텐츠들의 폭넓음과  깊이에 좀 놀란다. 사이트는 투박하지만 다방면의 심오한 (즉 어려운!) 이론들과 삶의 현장의 질퍽하거나 발랄하거나 진솔한 이야기들이 격의없이 올라와 있다.
그러한 전방위적 콘텐츠들과 함께 시스템 운영자의 디테일하고 감각적인(전개되는 당대의 기술에 대한 감각을 나름 긴장감 있게 유지한다는 면에서) 문제의식이 슬쩍 드러나면 – 잘 모르는 게으른 구경꾼으로 보기에는 – 아직은 소박하지만 뭔가 파워풀한 가능성을 가진 시스템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생겨난다. 그러기를 기대한다.  
그나저나… 나의 감각은 점차 둔해지고 있다.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학습을 통해 유지되는 감각인데, 워낙 게으른 데다  천성적 아날로그적 습성은 그러한 긴장을 유지하길 거부하고, 직장을 나온 이후로는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한계도 작용하다보니 점점 더 새로운 트랜드에서 멀어진다. 스마트폰만 하더라도 그에 열광하는 사람들에 비해 활용도도 훨 낮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아쉬움은 별로 없다. 한창 일할 때 좀 더 재밌고 신나거나 의미있는 일을 만났다면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으나 그러지 못했고, 지금은 나의 나이나 한계를 인정하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사실 좀 딴 데 마음이 가 있긴 하다.)
그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궁리로 머리가 복잡하긴 하지만, 어쩌랴…
(헉. 요만큼 길이의 잡글을 쓰고 나서도 다시 읽어보니 오타와 어색한 문맥이 보여 몇 군데나 고쳤다. 전화를 받거나 밥을 먹으면서 딴 일을 하는 걸 – 어떤 때는 이 세 가지도 동시에 한다.-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집중력의 급격한 저하를 슬퍼할 일이다. T.T)

개념배우

http://thewarak.com/79
오래 전,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소신있는 발언을 하고 행동하는 허리우드의 ‘개념배우’들을 보면서 왜 우리 사회엔 그러한 멋진 배우들이 없는가를 얘기하며 부러워하며 한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나아졌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젠 우리에게도 이런  배우들이 종종 등장한다. 충분히 멋지고 반갑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그런데 우리가(우리 사회가) 그들을 충분히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가는 모르겠다.

* 12월도 벌써 중순. 매년 이맘때의 이 아쉽고 안타깝고 절실해지는 시간의 감각, 생의 감각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준비해놓은 히트텍 내복에 히트텍 양말에 두터운 목도리, 장갑, 심지어 새로 장만한 손난로(아이폰 보조 배터리 겸용이라 뭐 쓸만은 하다.)까지 동원하니 그럭저럭 지날 만은 한데, 추운 겨울을 이리 지내는 거에 대해, 이 야단스런 엄살에 대해 한 줄기 관통해가는 찔림이 있다.
오늘도 촬영이 있다. 하필 이러한 유난한 추위에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공연이라니.
주요관람 대상이 저소득층 자녀, 다문화가정, 장애인들인데, 공연장소에 오기가 힘들지 않겠는지.  
과연 프로그램명대로 “희망 나눔 환타지”가 될 수 있을런지.
희망나눔이 환타지임을 차갑게 깨닫게 되는 거 아냐? 라는 삐닥한 생각이….. -,.-;;


* 내 삐닥한 생각과 달리 공연은 호황이었다. 객석은 차고 넘처 사진 촬영하기가 어려울 정도.
아이들의 젊은 부모들이 아이패드나 갤럭시탭을 높이 들고 동영상 촬영을 해대는 바람에 더욱 어려웠던 촬영이었다. 고로 그닥 소외 지역은 아니었단 거.
비눗방울쇼나 레이저쇼 같은 거야 내 흥미를 자극할 게 아니지만, 샌드 애니메이션은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젊은 커플이 나이가 들어가는 걸 형상화한 대목에선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짠했다.
사진을 올리고 싶지만 지금은 너무 귀찮아서 미룬다.
몸이 너무 무겁고 무기력해졌다. 조치가 필요하다. 

연말에.

* 렌즈 하나, 만년필 하나를 분양 보내고 이어 책들을 내보내려 하고 있다. 
새로 나온 시와의 시디를 구입하려 알라딘에 접속했다가, 가진 책들을 팔아보라는 권유 메시지에 혹한 게 시작.
할 일도 많은데 제껴놓고 다시 안 보겠다 싶은 책들을 과감히 골라내어 이중 알라딘 중고샵에서 처분 가능한 걸 등록하다보니 63권, 3박스가 넘고 매매가가 189,300원이나 된다.
남은 책들은 아주 최근의 것을 제외하면 오래 되어서 매매가 안되는 책들이거나 언젠가는 다시 보겠다 싶은 책들이고, 대체로 먼지가 조금 앉은 것들이 많다.
생각해보니 예전엔 책 사는데 매우 매우 신중하게 고민을 했더랬는데, 요즘엔 덜 고민을 한다. 그러니 다 안 읽고 내보내는 책도 좀, 아니 꽤 있다. 반성할 일이다.
알라딘 중고 이용의 단점도 이것이다. 정가에 비해 훨 저렴하다 보니 팍 꽂히는 책이 아니어도 좀 느슨한 잣대로 선택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읽는 것에 좀 소홀해진다. 기억하고 명심해둘 일이다.
어쨌거나 책장이 좀 헐거워지고 책상위와 아래에 마구 쌓아논 책들이 책장으로 옮겨지니, 내 마음도 좀 헐거워지고 가벼워졌다. 책상도 훨 넓어졌다. 부스스한 머리를 쳐냈을 때처럼 기분이 좋다. 넓은 책장을 가지고 싶은 욕심도 좀 사그라든다.
당분간 새로 책을 들이는 걸 자제하고, 이미 내 것이 되었으나 미처 읽지 못한 것들을 읽어야겠다.
그리고, 바깥을 서성이는 걸 줄이고, 내 안의 것들을 응시하고 돌보아야겠다.


* “삶의 어느 법정에서건 나는 그녀를 위해 증언할 것이다.”(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라는 문장에 연필로 줄을 쳤다. 책머리에, 그것도 편집자에게 감사를 전하는 대목 말미에다가!
좀 어이없긴 하지만, 그러한 나, 또는 그녀를 가졌는지를 생각해보는 건, 새해를 앞둔 이 시점에서 어울리는 작태인 거 같긴 하다.

*카메라 무상 AS 기간이 12월 22일인데 아직도 가지 못했다. 오는 토요일과 월요일 촬영이 있어서 아무래도 담주 화요일에나 아슬아슬하게 가야할 듯 하다. 무상 서비스 기간이 지나면  핀 점검 등에 돈이 꽤 드므로 그 전에 점검을 받아야 한다.

내 삶에도 누군가가 댓가없이 혹은 적은 댓가로 교정을 해줄 수 있는 때가 있었을 텐데, 지금은 오롯이 내 부담이다. 그런 지가 이미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포커스만 헐렁해진 것이 아니다. 어긋나고 마모되고 잘못된 것들은 점차 늘어나는데, 이제는 아무리 큰 댓가를 지불해도 아예 교정 불가한 것들이 많아진다.
어쩌면 헐렁하고 어긋난 포커스를 가지고 망연해하거나 한탄할 게 아니라, 그에 기반한 새로운 미학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술 마시고 들어와.

술을 마시고, 그만큼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들어온 날.

내가 쏟아내고 온 말들의 양과 내가 마신 술의 양을 가늠해보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은,
내 안에 들어온 알콜은 휘발되거나 흡수되어 배출되지만,
내가 뱉아놓은 말들은 휘발되지도 배출되지도 않는다는 진실.
어제 몸이 찌부등하여 반신욕을 하면서 읽기 시작한, 술김에 흘리기도 한, 희랍어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생각난다.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대 희랍어는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 제 2의 태, 중간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한단다.
“….. 예를 들어 ‘사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을 사서 결국 내가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언어”라는 희랍어가, 이런 매혹적인 언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가 쓰는 언어에 중간태가 없다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다행이란 말의 반대말은 불행인가? 라는 생각에 잠시 주춤. 그런데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우리가 쓰는 언어가 희랍어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과묵한 사람이 되었을 게다.  
그러다 어쩌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사태를 맞닥뜨렸을 지도 모른다.
중간태 같은 것도 없고, -“놀랍도록 정교하고 면밀한 규칙 덕분에” 간명한 문장으로 압축된 의미를 갖는 희랍어의 경우와 달리- 너무 많은 말로 소통을 하면서 사는 우리는, 나는, 얼마나 불완전하게, 얼마나 많은 말들을 지껄이며 살고 있는 것인지.
* 방에 들어와 옷도 안갈아입고 씻지도 않은채 엎어져 몇 시간을 자다가 일어났는데, 스탠드와 모니터가 켜져있고 저장도 되지 않은 글자들이 저리 나열되어 있다. 참 술 마시고 그 시간에 들어와서는 저리 오타도 없이… 피식 웃음 나온다.
어젯밤엔 C삼촌이 만들던 책이 나와서 한 턱 낸다고 모여 거하게 먹은 자리.
그러한 일들이, 서로서로에게 신나게 ‘한 턱 내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주문을 외우며 잔을 부딪혔던 일이 떠오른다.
술자리가 망년회가 되면서 길어졌었지. 그러고 보니 바야흐로… 망년회 시즌이구나.
거하게 먹은 선어회와 노가리와 생선구이로 뱃속이 아직도 든든.
두어 끼는 안먹어도 배 안고프겠다.    
* 어느 블로그이웃의 주소를 다시 클릭해본다.
얼마 전 올라온 포스팅의 낌새가 꽤나 어두워보여 뭔가 댓글을 남기려다 말았는데, 다음에 가 보니 모두 날아가버리고 없다. 몇 번 내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 알게된, 내게는 순전히 그 블로그 주소상에만 존재하는 사람인지라, 그 전부의 흔적이 모두 날아가버리고 “등록된 포스트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만 남은 텅 빈 여백이 좀 스산해보인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전거 타고 달린 길들과 살아가는 삶의 길의 풍경들을 기록해오던 걸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지는 건 어떤 때인가? 라는 의문이, (나중에 맘 바뀌면 살릴 수 있게) 백업은 해놓았을까? 혹 비공개로만 해놓은 걸까? 로 이어지는 건 확실히 직업탓이지만, 그만은 아닌… 산책가던 길에 늘상 기웃거리던 집 하나가 한순간 사라져버린 걸 보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 올해 첫눈을 아직 보지 못했다. 어젯밤만 해도 꼭 눈이 올 것 같았는데, 아직도 깜깜 무소식.
눈이 오기 전에, 땅이 얼기 전에, 카메라 AS나 받으러 가야겠다.
무상 서비스 기간이 끝나기 전에, 다음 촬영날이 오기 전에.  

Beginers

허용님의 블로그에서 추천글을 보고 솔깃하여 짬을 내서 보고 왔다.
한낮의 씨네큐브는 (상상마당도 괜찮다.) 혼자 영화를 보기에 더 없이 좋은 공간.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모든 걸 잊고 그 공간을 홀로 차지한 듯 영화에 몰입할 수 있다.
영화에 완전히 몰입되지 않더라도 괜찮다.  
영화 때문에 촉발된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나올 때도 그냥 흐르게 내버려두면,
스크린 위에 영상이 흐르듯, 그 흐름을 따라 내 의식도 편안히 흘러가는 느낌이 된다. 상쾌하다.

영화는… 좋았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을 모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알고 있던 거 같은데 아무리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150개의 단어를 알고 있지만 말은 하지 못하는 아서처럼. 
허용님은 “신파 없이 슬픔을 이야기하고 맹목과 환상이 제거된 사랑”이라 표현하였지만, 혹은 그래서 그러한가, 사랑에 빠지는 이들-아들 커플 뿐 아니라 아버지 커플 또한-을 보며 가슴이 설레고 아려와서 조금 놀랐다. 신파가 아니어도 영화든 드라마든 시사 프로그램이나 뉴스를 보다가도 눈물이 나곤 하지만, 그와는 좀 다른 느낌의 떨림, 좀 더 깊은 곳에 형성된 진앙에서부터 잔잔하나 뻐근하게 전달되는 진동같은.
(강도는 달라도) 첫사랑을 보는 듯, 혹은 처음 달착륙에 성공한 우주인을 보는 듯.
그래서 모든 사랑에, 우리는 비기너란 것인가.

올리버(이완 맥그리거)가 그리는 ‘슬픔의 역사’라는 일러스트는 책으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아서같은 친구와 함께 산다면…  
그런 멋진 개든 고양이든 그러한 파트너와, 함께 살 수 있는 그러한 아담한 집이 있고, 또 할 일-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 말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 외로워도, 외로움을 견디는 삶이어도 좋지 않을까, 란 생각은… 교만한 걸까?
그래도 시방은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야… 하는 생각이  -,.-;;
그런데 왜 이 영화가 ‘월동준비’에 좋다는 건지는 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