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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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의 후유증이라도 되는 양, 뻔뻔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우울.
그 와중에 도착한 책은 순전히 번역자와의 친분 때문에, 의리로 주문한 책인데,
받고 보니 어찌 나를 위해 번역을 하신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핸드폰으로 생색내기용 사진을 보냈더니, 집에 몇 권 있다며… 진정 책을 사랑하는 처자로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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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어가는 우울을 떨쳐내기에 꽤 효용이 있었던 외출.
클래식 전곡을 딴 짓 안하고 집중해서 끝까지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빅토르 할아버지는 저 연세에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고 현란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구사할 수 있는지,
직업병 없이 어떻게 손을 간수하시는 지도 몹시 궁금.
(나는 그리 많이 쓰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 저림으로 나이키 아대를 하고 다니는데!)
다음 생을 맘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작은 움직임으로 큰 소리를 내는 큰 울림통을 가진 콘트라베이스 주자를 선택하리라.
이 생엔 글렀지만 다음 생에라도, 그런, 큰 울림통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단 말이지.

오래된 궁금함이 있던 마크 로스코 전시.
스티브 잡스를 마케팅에 끌어들인 건 정말 영리한 한 수 였다는 생각.
관람 후 로스코의 죽음을 암시했다고 전해지는 유작- 피의 레드- 엽서를 집어들자 동행했던 R군이 계산을 해주며 말했다.
“죽지는 마시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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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인이 히스토리를 아는 곳이라며 안내한 더바도프 The Bar Dopo.
이곳을 처음 만들었다는 주인장이 운영하고 있다는 군산의 가게도 언젠가 가볼 수 있으면 좋겠다.

지리산에 처음 올랐던 어린 시절엔,  ‘세상에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참 많구나, 그러니 더 살아봐야겠다’ 라고 일기에 적었더랬는데,
한참의 세월이 지난 지금엔 이렇게 적어보아야겠다.
‘세상엔 아직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음악도 많고, 볼 수 있는 근사한 미적 성취들도 너무 너무 많지만,
그보다…. 아직 맛보지 못한 맛난 것들이 너무나 많으니 좀 더 살아봐야겠다’ 고.
하룻동안 다소 화려한 포즈로 감행한 예술의 향유, 그 끝이 이러하니,
당분간 엥겔지수가 좀 올라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어제 들었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을 내내 듣는다.
R군이 추천했던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다.

2015년 봄

유난히 아픈 이들이 많은 봄이다.
나처럼 때늦은 감기로 골골한 정도가 아니라, 온 몸의 세포로 고통을 견디면서, 더러는 지난 생을 돌아보며 조용히 정리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자주 마음이 무겁고 울컥해지기도 한다.

어제 저녁, 감기로 콜록거리는 나를 불러내 곰탕을 먹여준 후배는 어떤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해 내가 연애에 있어 “로맨티스트” 유형에 속한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로맨티스트라고? 다소 의아하여 내용을 들어보니 더러는 조금 빗나가기도 하지만 대체로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면면들이 있다. 그 분류에 의하면 리얼리스트를 만나면 대략 난감이고, 아이디얼리스트를 만나는 게 좋다는 결론이다.
근래 들어 다소 서걱이거나 살짝 불편해지는 인간관계에 마음이 어지러워질 때가 있었는데, 그 마음 안쪽을 찬찬히 들여보게도 된다. 그래 어쩌면 그런 성향상의 부대낌이 있었을 수도 있지 하고.

그렇다하더라도,  관계를 지속시키는 가장 큰 힘은 무엇보다 공감의 폭, 깊이 그런 것일 텐데, 그게 꼭 취향이나 코드 그런 것과 나란하게 가지 않는다는 생각도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시키는 일이어서 때로 파악이 잘 안되기도 한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누구나 겪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의 시간은 그런 공감의 밀도나 깊이가 맨 얼굴로 드러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 결과지가 때로 실망스럽거나 당혹스러울 지라도, 겸허하게, 혹은 용감하게 그를 수용해야한다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명심할 것은, 내 결과지를 그 어떤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

오른쪽 새끼 손가락이 아픈 걸 내내 방치하고 있었는데, 요만큼의 타이핑을 하는데도 자꾸 제 존재를 아프게 주장하는 이 녀석이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직업상 내게 참으로 소중한 손가락의 하나인 것을. 근처 정형외과가 있나 찾아봐야겠다.

이 봄, 큰 고통과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모아 응원을 보낸다. 부디…

음모(陰謀)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음모(陰謀)”라고 했다지.
신영복 선생님은 그에 덧붙여 우리를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구조속에서 음모는 “든든한 공감의 진지”라고 말씀하셨고.

그런데 그 음모가 불온함보다 “든근한 공감”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이 그 관계 내에서만임을.
그 관계가 어긋나거나 틈이 생긴 후 드러나는 맨 얼굴의 음모는 그야말로 음모일 뿐이어서,
어쩔 수 없이 불온하고, 더러 초라하기도 한 것임을.
그리하여 우정이든 사랑이든 지나가는 것은 그저 그대로 지나가게 해야하는 것임을.

이 화사한 봄날에 이런 칙칙하고 서글프기도 한 생각이 드니, 고개를 들어 크게 휘휘 저어 본다.
이른 더위, 라는데 난 왜 으스스하지.
어서 창문 있는 곳으로 이동을 서둘러 봐야겠다.

선데이 시크릿, 바램

뒤척이던 내 방 한 구석에 이젠 나올 법도 한데 찾으려 하면 사라져
한없이 간절했던 지난 나의 설렘 이제는 끝이 없는 바램
소중한 것은 움켜쥘수록 다가가려고 할수록 조금씩 멀어지는 걸
너에게 들려줬던 지난 나의 노래 이제는 끝이 없는 바램

**현실 감각은 무뎌가고 떠밀려 오는 삶의 무게가

오늘도 내일도 멈춰 서게 한다 꿈이라는 저 언덕 아래
나이란 놈을 먹어갈수록 수염이 굵어 갈수록 나는 더 작아지는 걸
너에게 들려줬던 지난 나의 노래 이제는 끝이 없는 바램

긴 밤, 이른 출근

두 세 시간을 뒤척이다 일어나고 말았다. 따끈한 우유와 자른 양파도, 난해한 헤겔 정신현상학 책도 잠을 이루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요즘 들어 부쩍 잠이 줄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혹 죽은 이들이 산 자들의 잠을 깨우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창가에 검은 빛들이 어른거리고 습히고 찬 기운이 지나가는 듯도 하였다.
벌써, 1주년이다.

쎄시봉

친한 이의 강권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영화다.
덕분에, 뻐근하게 일하고 돌아와 미세먼지로 따끔거리던 눈이 진정이 되었다.
노래들은 어찌나 잘 부르는지!

덕분에 오랫만에 필 받아, 잊고 있었던 기타를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조율을 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영화 속 상황처럼 F코드가 너무 편안하게 잡혀 깜놀.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마지막 즈음에, 이장희의 나레이션은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고.
그 말이 맞는다면,  속절없이 늙어가는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것일게다.

서서 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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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일을 앞두고 나른한 춘곤증과 사라지지 않는 피로, 계속되는 두통과 어깨, 허리 결림을 고민하다 용단을 내려 서서 일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펀샵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높낮이 조절 “베리데스크“가 그야말로 이상적이겠지만 50만원이 넘는 금액은 투자하기엔 넘사벽이고,
문헌정보 이대표님(캔디에 나오는 스테아가 되고 싶어하는 사장님!)처럼 직접 나무를 짜서 만들고도 싶지만 현재로서는 불가하니(언젠가는 목공을 꼭 배우리라)
돈도 없고 기술도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터넷을 뒤져, 대충 맞을 만한 받침대를 구해 열심히 조립해서 낑낑대고 얹어 보았다.
결과는 보기엔 대략 만족.
한데 이틀 정도 사용해보니… 기능성은 잘 모르겠다.
어깨는 좀 펴지는데 허리는 여전하고 발바닥과 종아리가 좀 아파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딱히 늘어나지도 않는다.
앉았다 일어났다 할 수 있으면 나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스템으론 불가하고
“앉아서 일하다 힘들면 쉬어야죠.”라는 파인애플의 말이 역시 진리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결론은… 그냥 나는 공부나 일 체질은 아닌 걸로.
그리고 목공은 꼭 배워 보기로. (언젠가는 제대로 된 베리데스크를?)

가장 외로운 고래, 52

“가장 외로운 고래, 52″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이 고래가 52라는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이유는 52Hz, 정확하게는 51.75Hz 주파수로 나 홀로 노래를 하기 때문이다. 일반 고래는 12∼25Hz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이 고래는 특이하게도 52Hz로 말하는 것.

고래가 처음 발견된 건 1989년 미국 국립해양대기청 NOAA의 수중 청음 장치에서다. 이후 1992년 미 해군이 주파수에서 이름을 따서 52라고 이름 지었다.”

출처

주파수로 발견된 이후 20년 동안 그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던 이 고래를 찾는 여정을 영화로 만든단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에서 기금을 마련하였고 환경 보호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참여했다는데.
글쎄. 우리가 외롭다 여기고 찾아나서는 게 고래 52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어쩌면 그는 소통의 한계, 혹은 불가능성에 회의를 느끼고 자기만의 주파수를 개발해 저만의 노래를 자유롭게 부르고 있는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자기를 외로운 고래라 칭하며 떠들썩한 이벤트를 벌이는, 실은 자기보다 더 외롭고 불쌍한 존재들일 수 있는 인간들을 어떻게 바라볼 지, 아마도 인간들은 독해하기 어려울 그의 반응이 궁금하긴 하다.

나쁜 이야기

“나쁜 이야기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인간을 기능적으로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성실한 주인공이 있으면 어수룩한 동료가 있고 우유부단한 배신자가 있으며 비정한 악당이 있다. 몇 가지 전형적인 성격의 구현체인 인물들이 서사의 질주를 위해 필요한 대목마다 호출되고 소비되고 버려진다. 이런 식이라면 제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해도 우리는 거기서 오직 한 사람의 인물, 즉 창작자 자신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혹은 생각해봤더라도 절망에 빠져서 좌절해본 적이 없는, 그런 창작자 말이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들에는 인간에 대한 겸허함이 있어서 이런 말들이 들린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므로 너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감히 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나의 진실을 은폐하고 너의 진실을 훼손하지 않았는지 두렵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p143)

길고 고단한 하루였다.
오늘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긴장을 초래했던 탓인지 잠도 잘 자지 모했고, 오후의 일은 그리 매끄럽지 못했다. “웹환경이 변해서 7년 전의 그 헤비한 인터렉티브 플래시 무비는 지금은 …..” 하고 장황하게 설명을 해놓고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건 변하지 않잖아요? ” 라는 단호한 답변을 들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종일 무거운 피로감을 달고 움직이는데, 새벽에 깨어 오지 않는 잠을 포기하고 집어 들었던 책의 한 대목이 계속 빠작거렸다.
그리고 신형철이라는 이 섬세한 평론가의 문학 텍스트에 대한 어떤 태도 같은 것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 말들이, 우리가  스스로 창작자가 되어 자기 삶의 서사를 만들어가면서 타인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발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자기 삶의 “서사의 질주”를 위해 필요한 대목마다 타인을 호출하고 소비하고 버리는 그런 “나쁜” 태도를 대하게 될 때, 자신의 진실을 은폐하고 타인의 진실을 쉽게 훼손하는 일을 볼 때, 혹은 나자신이 그러한 “기능적” 대상으로 호출되고 소비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때의 기분은 얼마나 섬뜩하고 때로 참혹한가.

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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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졸이며 보던 드라마 “펀치”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막을 내렸다.
다행히도, 마음을 쓸어내린 결말이었다.
너무나 현실감 돋는 대사와 흐름에, 결말마저 그럴까봐 노심초사했던 건,
친구 말대로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와 같아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권력의 장 안에서 움직이는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욕망과 그 욕망을 관철시키는 방식들이
매우 적나라하면서도 꽤 치밀하고 설득력있게 그려졌다.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역시 윤지숙 장관일 터인데,
태생부터 이 땅의 초갑으로서의 삶을 영위해온 윤지숙 장관이 끝까지 깃발처럼 내세우는 (그마저 자신이 선점한 것으로 여기는) 신념이란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인가?

펀치를 거의 본방 사수하며 시청하는 동안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여러 번 사람들에게 이 드라마를 얘기했었는데,
드라마의 성향상 시니컬한 반응이 많았다. .
정치적인 것엔 관심이 없다는,
진보든 보수든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다 그 놈이 그 놈이니
어디나 새로울 것이 없다는.
머 뉴스를 보고 있자면 답답하여 복장이 터질 지경인 때가 많긴 하나…

전철을 오가며 읽고 있는 책의 한 귀절.

“… 가장 나쁜 죄는 그런 행위들을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허위적 보편성 속에 희석시키는 일이다. 이런 게임은 당사자에게 두 가지 이득을 안겨준다. 하나는 투쟁에 연루된 이들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결국 다 똑같은 놈들이지’)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완전한 책임을 떠안고 상황을 분석하며 한쪽 편을 드는 어려운 임무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65p) ”

드라마를 몰입하면서 보기는 쉽고 즐거워도… 이런 어려운 임무를 피하지 않는 건 그야말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