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베타

간밤에 베타가 숨을 거두었다. 너무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기운이 없어보여 비타민3종 세트 처방까지 해주었는데 한 이틀쯤 먹이를 먹지 않더니 조용히, 무심히 가버렸다.  수족관 사장님 말대로 우울증에 걸린 걸까? 그의 말대로 어항 한 대를 더 들여 나란히 놓아주어야 했을까? 기질상 혼자 살아야하는 애라고 하여 덜컥 데리고 왔는데, 혼자 외로워 우울증에 걸린 것이니 마주 볼 수 있는 어항 하나를 더 들여놓으라는 뻔한 상술이 얄미워 주저하고 있던 게 마음에 걸린다. 정말 외로워, 자발적 죽음을 택한 거니?

아침 일찍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항을 정리하고서 성미산에 올라 녀석을 묻어주었다. 명복을 빌고 미안하다, 용서도 빌었다. 오래 전 토끼를 묻을 때만큼 가슴이 아프거나 눈물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 두 손에 쏙 들어오던 토끼와 달리, 눈으로만 녀석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 때보다 나이를 많이 먹고 가슴에 굳은 살도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이제 수족관은 쳐다보지도 않으련다. 늦은 밤, H의 꾐에 빠져 맥주 한 잔 마시고 함께 걸어오다가 발견한 수족관 불빛에 끌려, 그 불빛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며 혜엄 치던 열대어에 홀려서 욕심을 낸 죄로…  아름다운 건 그냥 멀리 두고 봐야 하는 것을.  
미안하다, 베타야…  

밀회, 몸, 발의 말,

 

슬쩍 슬쩍 보아온 드라마 “밀회”가 끝이 났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그다지 비극적이지 않은, 뻔한 해피엔딩은 아니더라도 꽤 아름다운 엔딩이었다.
혜원이 인생의 크나큰 터닝포인트가 될 재판을 앞두고 찾은 선재의 방에서 나눈 대화가 여운을 남긴다.    

“지금 이 시간은 이 차 맛으로 기억해둘께. “
“풋. 뭘로 기억한다구요… 차는 무슨… 몸으로 기억해야지.”

재벌가의 우아한 노예로 살면서 부르조아적 교양으로 무장해온 혜원이 말하는 “차맛”이란 실상 선재의 “몸”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마지막 장면에서 선재의 독백과 함께 등장한, 햇볕을 온몸으로 받던 혜원의 몸의 실루엣은 얼마나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이던지!
(전반적으로 촬영이 정말 감각적이었다고 생각되는 드라마다.)

이러한 육체성, 육체의 감각만이라도 온전히 살아있는 세상이라면, 지옥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가령, 침몰하는 배에 갇혔던 아이들의 몸을 떠올리고 그에 감응할 수 있었다면, 어찌 이리 끔찍한 방향으로 시스템이 작동되는 것에 동조하거나 방기할 수 있었을지.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올라 옮겨보는, 김연수의 단편 “푸른 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 나오는 조금 긴 단락.

…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기즘은 중앙대학교로 바뀐 서라벌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학기 초 첫 시간이면 으레 클레스에서 제일  장난꾸러기처럼 보이는 남학생을 불러세워서는 ‘네 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얘기해봐라’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발성을 냈습니다’처럼 재치있게 대답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대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듯 머뭇거렸지여. 그러면 나는 그 학생의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긴 뒤에 눈을 감으라고 말했어요. 나는 인질범이고 너와 나 사이에는 외나무다리 하나뿐이다. 우리는 지금 100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 서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데 난간 같은 건 없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너는 죽는다. 그런데 내가 너에게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오지 않으면 잡고 있는 인질을 죽이겠다고 해서 너는 말성이는 참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굴 인질로 잡고 있어야 너는 목숨을 무릅쓰고 그 다리는 건너오겠는가? 그런 뒤에 예시를 하나하나 듭니다. 과 친구? 다들 아니라고 합니다. 애인? 반반 정도죠. 형제나 자매? 이번에는 좀 많구요. 부모님? 더 많죠. 눈을 감은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면 외나무다리 위를 걸어오라고 말하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제 네 발이 뭐라고 말하는지 얘기해보거라. 그러면 학생들은 힘을 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돌아가, 발 시려, 저 사람은 그만큼 널 사랑하지 않아 등등. 내가 들은 답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건 울음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울었습니다. 왜나하면 그 학생의 발은 그녀에게 목숨을 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죠. 삶을 이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귀 코 입만으로는 부족해요. 온몸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때로는 발이 어떤 상황을 더 잘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 p163)

반성과 회한의 나날들. 
연일 꿈이 어지럽다.
잠을 줄여야겠다. 
날씨는 왜 이렇게, 눈물나게 화창한지. 

얼굴

이 빌어먹을 나라 대통령의 어색한 연기(안산 분향소 방문시) 때문에 SNS가 들끓고 있는 걸 본다. 
슬픔을 위장하려 하였으나(정말 그랬을까?) 유체이탈, 사이코 패스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되어버린 이 얼굴은 다시 보아도 좀 섬뜩하다. 
 

유가족이 공개를 요청했다는, 세월호의 마지막 15분짜리 동영상속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일은 정말  쉽지가 않다.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소리를 들으며 깔깔대며 장난을 치고, 엄마 아빠 사랑해요, 를 얘기하는 아이들의 어여쁘고 말간 얼굴들은 이제 우리에게 차마 있어서는 안되었던, 엄청난 슬픔을 지시한다.  

 

코 앞에 쌓인 일들을 하려 모니터앞에 앉아 있다 집중이 안되어 한참 전에 N씨가 보내주었던 영화를 꺼내보고, 다시 큰 슬픔의(큰 슬픔을 연기하는)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끔찍한 슬픔과 고통의 얼굴을(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차마 표현할 수가 없어, 그저 먹먹하다고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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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car Peterson – Hymn To Freedom

비 오는 월요일

비 오는 월요일이다. 
이 비가 먼 바다에서 증발되어 구름으로 흐르다 여기 비로 내리는 거라면, 어쩌면 그 아이들의 마지막 눈물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오바하지 말라는 누군가의 얘기가 들리는 거 같다만.. 어쩔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시시때때로 무기력과 우울과 분노 같은 감정에 휩쓸려 비틀거리는 나날들이다.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치과진료 때문에 끊었던 알콜도 입에 대보았지만 꽤나 어리석은 시도로 판명이 났다. 

과도한 슬픔과 분노의 표출을 우려하거나 비판하는 소리도 들린다.
취지야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어찌 우리가 이 비극의 당사자, 애도의 주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우리가 이런 비극을 되풀이 맞이하고 있는 것은 그 주체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감각과, 그리하여 마땅한 애도가 없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공감능력의 과시”가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 공감 세포의 결여가 문제라는 생각도.
그걸 확인하게 되는 모든 일상의 자리가 너무 덧없어, 슬프고 무섭고 또 좀 외롭다.   

 

생각의 여름

故 남윤철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학생들 구하다가 의롭게 갔으니까 그걸로 됐다”는 故 남윤철 교사의 어머니의 말씀이 쿵, 하는 세기로 가슴에 내려앉았다.
과연 어떤 어머니가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이 상황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놔두고 살아 나왔어도 괴로워서 그 아인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 아버님의 말씀까지 접수한 후에야, 남윤철 교사의 그러한 의로움이 어디서 연유되었는지 짐작할 뿐이다. 

그 지고한 의로움, 윤리성.
어떻게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세월호의 선장처럼 행동하고 어떤 이는 이렇듯 의로울 수 있는 걸까?
그저 나와 (나의 확장으로서) 내 가족이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라면 대체로 모든 게 용인되던 이 땅의 질서가 (세월호 안의 그것처럼)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그 자체 유지를 위해서도)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윤리성의 문제가 우리의 인간적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가 이제라도 조금이라도 각성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이 반윤리적 정부가, 시스템이, 국민의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 지도.

하지만 설사 우리가 이번의 희생으로 그와 같이 개과천선한다 할지라도, 만에 하나 그렇더라도, 이번의 희생은 너무나, 정말 너무나 크쿠나. 

가까운 사람들이 손목 터널 증후군이라든지, 시력이나 치아 등 육체적 기능의 약화를 호소하는 일이 늘어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머지 않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손목이나 시력이 중요한 작업을 하는 처지에서, 또 그러한 불편함을 함께 감내하고 보완해줄 수 있는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될 그러한 육체적 변화를 감당하는 일은 꽤나 만만찮은 미션이 될 것이다. 

그런데 보다 두려운 건 그러한 약화, 혹은 퇴화의 조짐이 육체적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대체로 알콜의 힘으로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돌발되는 상황이지만, 도대체 어디에 꼭꼭 숨겨져 있었는지 모를 날 것의 감정들과 뾰족한 언어들이 약간의 히스테리적 정서를 동반하고 출몰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나의 퍼스낼러티를 만들어온 너그러움과 해맑음?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대체적인 타인들의 평가였는디…. -,.-)은 도대체 어디로 실종되어 버리는 것인지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사태다.
그것들을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묵은 감정의 찌꺼기로 여기고 치워버려야하는지, 내 안의 비명소리로 귀기울여야하는 것인지 아직 감이 안잡히지만,
막연한 불안 속에서도 뭔가 모르게… 아주 미미하나마 생의 본질 하나에 다가서고 있는 느낌이 있다.
이전엔 감지하기 어려웠던, 그 끝에서야 파악될 수 있는 어떤 본질, 혹은 비밀.  

* 어쨌거나 이러한 불편한 상태를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어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약간의 지름이 동반되는 이런 조치엔 고래동생과의 통화가 한몫을 했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결국은 받아들이고 익숙해져야하는 것일지라도,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리기보다  마음을 기울여 준비해서 맞이해야할 부분이 있다는 판단.
부디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한다. 

 ** 흑, 말이 씨가 되었다. 
눈이 계속 뻑뻑해서 병원에 갈까 말까하다 이가 시려 용기를 내 치과에 갔더니 엄청난 견적이 나왔다. 
내 신체 중에서 그나마 우성이라 자신할 건 치아밖에 없던 사람인데… 평생 충치 하나 없었고 사랑니 뺄 때랑 친구 따라 스케일링 두어 번 하러 갈 때 빼곤 치과 근처에도 안갔던 사람인데…  
충격이 크다. 

그나저나 나는 정말 감각이 무딘 사람일까, 잘 참는 사람일까.
어느 쪽이라도 내 육체를 잘 돌보아주지 않은 건 확실하다.  
그래서 감지가 되었을 땐 이미 크게 일이 벌어진 경우가 종종.
이건 어쩌면 엄마를 닮은 모양이다. 소화가 안된다며 자꾸 사이다를 드시다가 순식간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던 내 엄마.

이렇게 고작 이빨 한두개 때문에 툴툴거리던 나, 남쪽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까지 멍해진다.
차가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엄청난 추위와 끔찍한 공포를 온 몸으로 견디고 있을 아이들.
부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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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164p